사람의 기억은 완전히 신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냉철한 이성에 근거해서 온전히 있었던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무의식 중에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를 취사선택하거나, 있었던 사실을 왜곡하거나, 본인이 인지하지 못했던 사실을 인지했다고 착각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입니다.
이 기억의 왜곡이 만들어 내는 위험한 케이스가 바로 범인의 오인지목입니다. A라는 사람이 범죄피해를 겪었는데, 실제 범인인 B가 아니라 C를 범인이라 믿게 되는 경우죠. C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는데요, 이런 케이스가 지독한 이유는 실제로 A가 철석같이 범죄를 저지른 게 C라고 믿고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2013년에 발표된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2년에 걸쳐 범인 오인 지목 사건으로 판단되어 항소심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진 사건이 총 112건입니다. 이는 전체의 20.7%에 달하는 수치로, 오인 지목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채 유죄판결이 내려진 사건이 더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 규모는 더 커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전체 오인지목 사건 중 성폭력 범죄가 점하는 비율은 자그마치 58.9%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2017년 11월, 춘천지방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진 A씨의 사건은 전형적인 오인지목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피해자 B씨는 지하철에 탑승하기 위해 출입문 인근에 서있었는데, 탑승구에 올라타나는 순간 혼잡한 상황에서 누군가 B씨의 신체를 쓸어내리 듯 만진 거죠. 이 상황에 화들짝 놀란 B씨는 가까이 있던, 가장 의심스러운 A씨를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그런데 A씨는 그 시점에 아내에게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죠.
물론 이 사건 피해자 B씨의 진술은 그 진정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진정성 있는 진술이 진실에 부합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법원은 사실관계를 기초로 B씨가 범행 상황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주변 정황이나 당시의 위치 등을 고려하여 피고인은 범인이라 추측하고 지목한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A씨는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죠.
성폭력은 분명 언벌을 통해 다스려야 할 범죄입니다. 당연히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하죠. 허나 성폭력 범죄에 대한 사회적 지타은 유죄판결 이전부터 시작되며, 설령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온전한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유사한 사건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반드시 사건 초기에 변호사와 상담하여 신속하게 해결책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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